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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시민혁명 후 파리의 거리는 달콤·바삭·고소함이 넘쳤다

김동훈

‘파사주’의 제과점

[서양고전학자 김동훈의 물질인문학](20)시민혁명 후 파리의 거리는 달콤·바삭·고소함이 넘쳤다
17세기 말~18세기 초 프랑스 파티시에(제과장인)를 묘사한 일러스트. 당초 과자는 1000년 동안 주로 교회와 수도원에서 만들어졌지만, 17세기 들어 귀족의 저택에 고용된 파티시에들도 과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프랑스대혁명 이후 일자리를 잃은 이들 파티시에들이 거리로 나와 제과점을 차리면서 외식과 과자점은 크게 유행했다.

17세기 말~18세기 초 프랑스 파티시에(제과장인)를 묘사한 일러스트. 당초 과자는 1000년 동안 주로 교회와 수도원에서 만들어졌지만, 17세기 들어 귀족의 저택에 고용된 파티시에들도 과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프랑스대혁명 이후 일자리를 잃은 이들 파티시에들이 거리로 나와 제과점을 차리면서 외식과 과자점은 크게 유행했다.

인류가 처음부터 과자를 즐겼던 것은 아니다. 향신료 없이 살았던 시절이 있듯 과자 없이 사는 데도 아무 지장이 없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종교를 통해 과자가 일단 사람들에게 소개되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더라도 없으면 허전한 것이 되고 말았다. 후식이나 간식에 불과한 과자를 둘러싼 독점과 통제의 역사가 있었다. 그 후 과자에 대한 관심은 특별한 문화를 꽃피웠다. 오늘날 여분의 것이라 여긴 과자가 우리에게 하나의 위로가 되었다.

■ 성직자들의 과자 독점

고대 사회에서 과자는 종교적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통과의례, 그러니까 사람이 탄생하고 성장하고 결혼하면서 그 과정을 거칠 때마다 신들에게 바쳐진 게 과자였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결혼식에서 과자가 신에게 봉헌된 후에야 신랑과 신부는 비로소 온전한 부부로 인정받았고 그 결혼(서약)의 증인들인 하객들에게 과자가 분배되었다. 심지어 죽고 난 이후 저승세계를 지나갈 때도 과자는 그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꿀 섞인 과자’ ‘멜리투타’가 지옥을 지키는 개 케르베로스에게 던져지면 망자는 그 헤벌쭉한 괴물의 아가리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이런 특별한 날들을 제외하고는 과자는 인간으로서는 구경하기조차 힘든 신들만의 새참거리였다.

3세기부터 13세기에 이르는 1000년 동안 과자는 주로 교회와 수도원에서 만들어져 통제되었다. 평민들은 교회와 수도원이 운영하는 공동 오븐을 사용한 대가로 곡물, 포도, 달걀, 치즈 등을 의무적으로 바쳐야 했다. 이런 식자재들을 통해 수도사들은 포도주, 빵, 과자 등을 만들었고, 케이크와 같은 더 달콤한 먹거리를 위해 벌을 쳐 꿀을 직접 얻기도 했다. 수도원 안에서 만드는 과자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복’이란 뜻의 ‘에울로기아’였는데, 수도사들은 수도원 식당에서 이것을 나누며 서로에게 축복하는 의식을 했다. 과자는 나눠 먹는 이들에게 종교적 유대를 강화시켰던 것이다.

성직 이외의 사람들에게 과자가 전달되는 계기도 있었다. 수도사들은 관계를 맺고 있는 왕족이나 귀족들에게 자신들이 손수 만든 과자를 선물로 주었다. 또한 일반인들에게는 성찬식을 통해 과자를 분배해 주었다. 중세인들은 성찬식의 과자가 사제들을 통해 자신들에게 나누어질 때만 구원이 보증된다고 여겼다. 그뿐만 아니라 생일, 세례, 성찬식에 처음 참여하는 사람을 위한 케이크도 축하용으로 만들어졌다. 이렇듯 중세시대에는 과자에 종교적 의미를 아주 강하게 부여했다.

11세기에서 13세기 십자군 원정으로 설탕, 향신료가 동방으로부터 유럽으로 수입되면서 과자의 인기도 상당히 높아졌다. 물론 이미 1세기부터 말레이반도, 시리아, 이집트 등지에서 사탕수수 재배가 있었지만 유럽에 설탕이 전해진 것은 11세기 말이었다. 처음에 소개되었을 때 설탕은 향신료로 취급받아 귀족층만 맛볼 수 있던 사치품이었다. 하지만 15~16세기 신대륙으로부터 설탕이 다량으로 들어오면서 과자에 대한 평민의 욕구는 급상승했고, 그 결과 오븐이 수도원에서 평민에게 개방되는 결과를 낳았다. 과자 소비량도 당연히 늘어났다. 그러면서 성찬식 과자를 전담하는 장인들이 13세기 초 길드를 만들어 계속 유지되다가 15세기에 이르러서는 제과 장인들의 길드로 편입되었다. 16세기 이후로는 수도사들이 과자를 상품으로 만들어 판매했다. 프랑스혁명 때까지도 이탈리아에서 전해진 마카롱 판매로 유명한 수도원이 있었으며 초콜릿 비스킷으로 알려진 수녀원도 있었다. 수녀들은 선교하러 나간 식민지에서 과자 굽는 기술을 전해 주기도 했다.

■ 귀족들의 과자 독점

17세기 루이 14세(1643~1715년 재위) 시대에는 이탈리아 아이스크림이 유럽에 소개되었다. 당시 아이스크림은 설탕과 함께 다양한 곡물가루와 향신료를 크림에 섞어 얼린 것이었다. 귀족들은 아이스크림을 대단히 즐겼기 때문에 요리사에게 이것을 전문적으로 만들도록 했다. 점차 제과장인인 ‘파티시에’가 귀족에게 고용되면서 귀족의 저택에서도 과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유럽 귀족들이 즐겨 먹었던 과자는 과일파이, 과일설탕절임, 누가와 같은 것으로 이탈리아 요리사들을 통해 전해진 것이었다. 귀족들은 과자를 자신들을 과시하는 데 사용하였다. 루이 14세 이후 오랫동안 볼록 튀어나온 뱃살이 성공의 상징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루이 14세 때부터 루이 16세 때까지 베르사유궁전에 있는 귀족들은 매일 공짜로 식사를 하고 숙박을 했다. 이때 궁정에 있던 일부 사람들은 왕으로부터 독점권을 받아 파리의 거리에 과자점을 내어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18세기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난 마리 앙투아네트(1755~1793)는 프랑스 왕비가 되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늘 오스트리아를 그리워하며 어린 시절 먹던 온갖 종류의 과자로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특히 초승달 모양의 브리오슈를 즐겨 먹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기름지고 향기로운 버터와 다량의 달걀, 달콤한 설탕을 물이나 우유에 섞어 발효한 밀가루 반죽을 가볍게 부풀려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든 빵의 총칭이었다. 빈에서는 크루아상의 원형이라고 알려진 초승달 모양의 브리오슈가 인기였다. 그 기원은 1683년 터키 군이 빈에 쳐들어오자 빵을 굽던 제빵사가 터키 군의 침략 사실을 알리기 위해 초승달 모양의 빵을 구운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이도록 하세요”라고 했다는 말에서 케이크는 원래 브리오슈였다. 이것이 영어로 케이크라고 번역되면서 많은 오해를 낳았다. 그런데 사실 이 일화가 소개된 것은 앙투아네트가 결혼하기도 전인 1769년에 출판된 장 자크 루소(1712~1778)의 <참회록>에서다. 하지만 이 일화는 혁명군이 왕비를 제거하기 위해 퍼뜨린 일종의 가짜뉴스로 쓰이면서 시위대의 공분을 샀다. 프랑스혁명 당시 경제위기로 빵 값이 오르자 빵을 먹지 못한 시위대를 자극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프랑스혁명 이전까지
성직자·귀족, 과자 독점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귀족과 부르주아 상류층은 브리오슈를 카페에서 자주 접했던 반면, 농민들은 경기 침체와 함께 빵을 먹기조차 힘들게 되었다. 귀족들이나 먹는 브리오슈는 자신들이 구할 수 있던 거칠고 맛없는 검은 빵과는 너무나 큰 대조를 보였다. 혁명기에 브리오슈를 먹는다는 것은 농민들에게는 꿈도 꿀 수 없는 사치였다.

■ ‘파사주’의 과자가게

혁명 이후 특권계급 몰락
저택서 일하던 요리사들
거리에 제과점 등 차려
신흥 부르주아로 떠올라

프랑스혁명 후 특권 계급의 사제들과 귀족들은 대다수 몰락했지만, 신흥 부르주아로 진입한 시민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요리사들이었는데, 귀족의 저택에서 일자리를 잃고 거리로 나와 직접 레스토랑이나 제과점을 차렸다. 많은 사람들이 과자가게를 개업했고 당시 거리 풍경 중에 특이한 것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과자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 데다 파리 거리들은 19세기 중반이 되면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함께 외식하는 사람들로 붐볐고 그 식당들은 다양한 과자들을 선보였다. 혁명 이후 생긴 파리 거리들은 1820년에서 1850년대에 이르러 매우 번성한 아케이드를 형성했다. 20세기 독일 사상가 발터 베냐민(1892~1940)은 ‘파사주’라 불리는 이곳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산업적 사치의 새로운 발명품인 아케이드의 지붕은 유리이며, 대리석으로 마감된 통로가 전체 건물을 관통한다. 아케이드의 소유자는 그러한 투기에 합의했다. 위에서 빛이 떨어지는 통로의 양편에는 우아한 가게들이 줄지어 있다.(발터 베냐민, <아케이드 프로젝트>)

1850년대 ‘파사주’ 인기
철재골조에 대리석 바닥
유리천장에 가스등 조명
특히 제과점의 아늑함은
프롤레타리아가 꿈꾸던
행복한 가정과 가장 유사

‘파사주’의 골조는 철재인 데다 대부분의 천장은 유리로 덮여 있어 비가 와도 맞지 않는다. 길은 대리석으로 마감돼 진흙탕이 튈 염려도 없고 조명은 가스등으로 되어 실내 공간처럼 아늑했다. 또한 양쪽으로 즐비한 대부분의 상점들은 정면을 유리창으로 만들어 상품을 진열했으며 그 상품들은 밝은 가스등의 조명을 받아 더욱 찬란했다. 이런 아케이드가 1850년 파리에는 150여개인 데다 1857년부터 2년에 걸친 파리 중앙시장의 리뉴얼로 이 거리는 모든 이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초승달 모양의 브리오슈 케이크(위)와 1870년경 프랑스 파리의 중앙시장. 브리오슈 케이크는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고향을 그리워하며 즐겨 먹어 유명하다. 중앙시장은 프랑스대혁명 후 생겨난 상점가인 ‘파사주’들 중 하나로 파리 시민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초승달 모양의 브리오슈 케이크(위)와 1870년경 프랑스 파리의 중앙시장. 브리오슈 케이크는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고향을 그리워하며 즐겨 먹어 유명하다. 중앙시장은 프랑스대혁명 후 생겨난 상점가인 ‘파사주’들 중 하나로 파리 시민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 따뜻한 가정에 대한 애틋한 소망

‘파사주’가 이렇게 사랑을 받은 까닭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그것은 따뜻한 가정에 대한 소망이자 추억 때문이었다. 발터 베냐민에 따르면 ‘파사주’의 공간 구성은 행복한 가정의 아늑한 실내를 경험케 했다고 말한다. 친밀하고 세련된 가정을 바깥으로 연장한 공간이 다름 아닌 ‘파사주’였다. 이것이 당시 프롤레타리아가 꿈꾸던 가정의 실내 모습과 딱 맞아떨어졌다고 한다. 노동자들이 고된 노동과 궁핍한 생활을 하더라도 하루하루를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파사주’ 거리를 오가며 각 상점들을 바라보면서 행복한 가정을 소망했기 때문이다. 그 많은 가게들 중 행복한 가정과 가장 유사한 곳은 단연코 제과점이었다. 유리창 너머 진열된 과자들은 가스등의 빛 속에서 더 아늑하고 몽환적인 가정의 모습을 꿈꾸게 했다. 그 공간 속에서 오순도순 모여 앉아 다과를 나누면서 앞으로 꼭 이루고 말 가정의 분위기를 즐겼다.

[서양고전학자 김동훈의 물질인문학](20)시민혁명 후 파리의 거리는 달콤·바삭·고소함이 넘쳤다

과자는 간식이나 후식 그 이상의 것이다. 과자가 고대와 중세 권력자들에게 평민들과 자신들을 구별 짓기 위한 도구였다면, 근대에 이르러서는 저마다 꿈꾸는 가정을 위한 도구가 되었다. 이제 그 여분의 것으로 취급된 과자에 대해 어떤 마음을 쓰는지에 따라 위로와 만족을 느꼈다.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도 맘껏 어리광을 부릴 어머니의 품이 그립다. 그렇다고 그 유년의 그리움 때문에 어머니에게로 갈 수도 없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어머니와 함께 나누었던 공간과 시간을 느끼기 위해 과자를 맛보는 것이다. 그때 과자는 추억을 회상하는 과거가 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술에 취한 아버지 때문에 숨죽이고 항상 목말랐던 어머니의 사랑 때문에 뭔가 부족한 듯 성장했다. 이런 어린 시절의 가정은 불안하고 걱정스러웠다. 이제 사랑과 행복으로 포근한 가정을 설계하며 제과점을 찾는다. 그때 과자는 소망을 다짐하는 미래가 된다. 과자는 과거와 미래의 가정을 현재로 불러낸다.

과자를 먹는 것은 그리움이자 미래의 생산력이 된다. 내 동심에 잠재력으로 있는 그리움을 현재로 끌어올리고, 내 이상에 가능성으로 있는 행복감을 미리 맛보는 게 과자의 참맛이다. 과자는 간식이나 후식이 아니다. 우리는 과자를 맛보며 영원한 ‘유년의 시기’를 살고 있다. 그 과자를 보는 섬세함 속에 무시하지 못할 문화의 깊이가 있다. 추억과 소망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과자를 먹으면서 어떤 것을 소망하는 것일까? 이제 저마다의 과자 가게로 달려가 그 여분의 것을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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