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코르셋·82년생 김지영…이젠 '낙태법' 남았다

낙태죄폐지공동행동 단체 회원들이 지난 2019년 4월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오자 환호하고 있다. /사진=홍봉진 기자

"낙태한 여성을 처벌하는 형법 제269조 1항과 낙태 수술을 한 의사를 처벌하는 형법 제270조 1항은 헌법불합치."

2019년 4월11일, 헌법재판소의 재판관 9명 중 7명이 낙태 처벌 조항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과도하게 제한해 헌법에 어긋난다고 판단해 낙태죄에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렸다. 많은 여성들의 환호한 이 결정이 나온 배경엔 2019년을 휩쓸었던 '페미니즘'이 있었다.

/사진=이미지투데이

2019년 '페미니즘의 해'로 불러도 손색없어2019년에는 여성인권과 관련한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먼저 '탈코르셋'의 등장이다. 탈코르셋이란 체형 보정 속옷인 '코르셋'(corset)을 '탈'(脫·벗어난다)한다는 뜻의 신조어로, 화장한 얼굴과 긴 머리 등 사회적으로 부여된 '여성성'을 거부하는 문화 운동이다.

탈코르셋 중 하나인 '노브라'(no bra·브래지어를 하지 않음)는 많은 논란을 낳았다. 특히 그룹 마마무의 화사가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은 채 흰 티셔츠를 입고 공항에 나선 모습은 '보기 민망하다' '가슴이 남자보다 작다' 등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더 당당하게 맞섰다. 노브라 패션의 선두주자였던 故 설리는 한 방송에서 "내게 브래지어는 액세서리와 같다. 어울리는 옷이 있으면 하고, 안 어울리는 옷을 입으면 안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탈코운동(탈코르셋 운동)은 화장품·헤어샵·성형외과 등 '꾸밈'과 관련된 업종의 매출을 줄인 요인 중 하나로 분석되기도 했다. 지난 9월 통계청 빅데이터센터가 제공한 '현대카드 매출기록'을 뉴스1이 자체 분석한 결과 2015년 하반기부터 2018년 상반기까지 성형외과는 644억원, 프랜차이즈 화장품 가게는 316억원, 미용실은 403억원 정도 매출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페미니즘 대표 서적으로 불린 책 '82년생 김지영'의 영화화는 관객 수 약 370만을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그 밖에도 예술경영지원센터가 발표한 2019 공연계 6대 키워드, 트위터가 공개한 10개의 사회 분야 키워드, 온라인서점 인터파크가 선정한 2019 출판계를 달군 핫이슈에도 '페미니즘'은 빠지지 않았다.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회원들이 지난 2019년 9월2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위한 국제 행동의 날' 맞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사진=뉴시스

66년 만에 낙태죄 '헌법불합치'…이제 시작이다무려 66년이 걸렸다. 낙태가 범죄로 규정된 것은 1952년 형법이 제정될 때였다. 헌재가 임신 초기의 낙태까지 전면 금지하고 이를 위반했을 때 임신한 여성과 시술한 의사를 처벌하게 한 법 조항이 위헌이라고 결정한 배경에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있었다.

기존의 낙태죄가 태아의 생명보호라는 공익에만 절대적인 우위를 부여해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제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만 낙태죄를 곧바로 폐지해 낙태를 전면 허용할 수는 없다는 판단에 따라 2020년 12월31일까지 낙태죄 관련 법 조항을 개정하도록 했다. 이때까지 법이 개정되지 않을 경우 낙태죄 규정은 전면 폐지된다.

하지만 이에 대한 관련 법 개정 논의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해당 논의가 유보되면서 낙태 책임은 온전히 여성에게 미뤄지고 있다. 처방과 유통이 금지된 낙태유도제 '미프진'이 온라인상에서 불법으로 유통되거나 가짜 미프진을 복용하는 사례가 적발됐기 때문이다.

윤상직 자유한국당 의원실이 식품의약품안전처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입수한 '최근 5년간 불법의약품 온라인 판매 적발 및 시정요구 현황'에 따르면 낙태유도제는 2015년 적발건수가 12건에 불과했으나 2016년에 193건, 2017년에 1144건, 2018년에 2197건으로 큰 폭으로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다.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과 시민건강연구소, 경희대학교 페미니즘 학회 '여행' 등 60여명은 2019년 9월27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에서 "헌법재판소가 형법상의 '낙태의 죄'의 위헌성을 확인하는 결정을 내린 지 벌써 6개월"이라며 "그러나 정부와 국회는 여전히 손을 놓고 있다"고 지적하며 구체적인 대책 마련을 촉구하기도 했다.

지난 2019년 12월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혜화역 앞에서 열린 '페미사이드'(Femicide·여성 살해) 철폐 시위에서 참가자들이 여성혐오 범죄와 여성폭력을 규탄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가수 겸 배우 故 설리(본명 최진리)와 故 구하라가 사회적 타살을 당했음을 지적하는 익명의 여성들로부터 시작된 이날 시위에서 참가자들은 "국가의 방관 속에 페미사이드가 계속돼 왔다"며 정부의 실질적인 대책을 촉구했다./사진=뉴스1

여성 대상 범죄 'STOP'…목소리 높아진다이처럼 낙태죄뿐만 아니라 여성 대상 범죄에 대한 대책을 갈구하는 목소리는 계속 커지고 있다. 지난 2019년 12월25일부터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방지하고 피해자 보호를 국가의 책임으로 규정한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이 시행되기도 했다.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로 발의한 이 법안은 데이트폭력, 디지털성폭력 등 '여성폭력'의 범주를 확대하고, 여성폭력 사건처리 및 회복 과정에서 입는 정신적·신체적·경제적 피해 등 '2차피해'를 규정하는 개념이 생겼다.

하지만 갈 길이 멀다는 게 여성계의 평가다. 성관계 중 몰래 피임기구를 뺀 '스텔싱' 등을 성범죄로 처벌하는 외국처럼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를 처벌할 수 있는 '비동의 간음죄' 등을 확립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지난 2019년 12월28일에는 서울 종로구 혜화역 인근 마로니에 공원에선 여성 2000여명(주최 측 추산)이 모여 '페미사이드'(Femicide·여성살해) 중단 촉구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여성(Female)과 살해(Homicide)가 합쳐진 페미사이드는 여성이기 때문에 살해당하는 범죄를 뜻한다.

이들은 "(여성을) 만지지마, 때리지마, 죽이지마, 강력처벌" 등의 구호를 외치며 "불법촬영, 데이트폭력, 가정폭력, 여성 대상 강력범죄 등의 기사가 매일 쏟아지는 한국, 정부와 기관들은 즉시 페미사이드와 성 불평등을 타개할 실질적 대책들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