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호구생활②] “로또 100장을 샀다”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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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구’(虎口). 이용당하기 썩 좋은 사람 또는 무모한 도전자.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는 자다.

게임 하다가, 혹은 현실 생활에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터. 많이 무뎌졌지만, 여전히 누가 나를 호구라 하면 화가 치민다. ‘바보짓’을 한 데 대한 자책이다.

우리는 스스로 호구가 되기도 하지만, 알게 모르게 호구를 강요당한다. 돈, 사회, 직장 상사에 의해 알면서도 바보가 된다. 치열한 삶 속에서 꾹꾹 ‘속앓이’만 할 뿐이다.

‘슬기로운 호구생활’은 일종의 ‘화풀이 기사’다. 호구가 된 그들을 대신해 말한다.

“내가 니 호구가!”


■로또 100장을 샀다

‘♥♡2020 쥐띠해 경자년 로또 대박 터지세요~!♡♥’

한 해외스포츠 기사의 ‘베댓’이다. 치열한 스포츠 댓글 시장에서 최근 여유롭게 ‘픽’을 받고 있다. 신종 댓글형 ‘행운의 편지’에 ‘좋아요’는 수백 개. 최근 인터넷 뉴스의 단골 배너 광고인 ‘로또 숫자공’도 힘이 넘쳤다. 새해가 오긴 했나보다.

로또 광고들. 괜히 눌렀다가 스팸 폭탄 맞았다. 로또 광고들. 괜히 눌렀다가 스팸 폭탄 맞았다.

2020년 새해 첫 슬기로운 호구짓은 ‘로또 대량 구매’다. 1년간 고생한 기운을 모아 연초 초대박을 터뜨리리. 로또 입덕에 무려 100장!! 총 500개 조합을 선택했다. 시가 50만 원어치다.


■아쉽다…연습종이다

호구생활도 좋지만 50만 원은 무리다. 다시 말하지만, ‘찐 호구’는 아니다. 5000원짜리 5장만 실제로 샀다. 이중 3장은 살짝 탐을 내시는 부장, 팀장님에게 전매 성공. 나머지는 로또 연습종이로 퉁쳤다. 단돈 4200원에 100장+컴싸 1개 세트다.


2시간 동안 체크한 로또 연습종이와 로또방에서 산 정식 로또. 끝까지 잉크 농도를 지키는 컴싸 내구성에 놀랐다. 2시간 동안 체크한 로또 연습종이와 로또방에서 산 정식 로또. 끝까지 잉크 농도를 지키는 컴싸 내구성에 놀랐다.

정식 로또는 부산 범일동 로또방, 890회 1등 배출지인 수영구 편의점과 연제구 로또방에서 샀다. 대기줄이 수십 m나 되는 범일동 명당에 갈 때는 회사 동료 부탁이 줄을 이었다.

숫자 조합은 나와 와이프가 1장씩 책임졌다. 나머진 ‘자동 선택’했다. 운빨 좋다는 친구가 계속 번호를 추천했지만 무시했다. 5만 원이라도 당첨되면 지분을 요구할 놈이다. 연습종이 숫자는 인터넷 번호 추출기를 돌려가며 골랐다. 일일이 체크하는 데만 2시간이 걸렸다. 지칠 때마다 한 번씩 마름모나 세모 모양으로 줄 세웠다.

실매물은 5장뿐이지만, 거부할 수 없는 설렘과 기대가 몰려왔다. 2등은 욕심이고 3등은 노릴 만했다. 890회 기준 세금 포함 147만 원이다. 출산을 앞두고 최근 베이비페어에서 봤던 J사의 360도 ‘회전 카시트’가 또 아른거렸다.


■돼지꿈 프로젝트

2003년쯤인가. 한 초등학교 앞을 지나는데 검은색 고급 세단이 길을 막았다. 정장을 입고 내리는 대통령. 구둣발 소리를 내며 다가오더니 내 전화번호를 여러 번 묻고 사라졌다.

그리고는 꿈에서 깼다. 재물운이 있다는 ‘대통령 꿈’이다. 대통령께서 물어본 우리집 전화번호가 복권 번호라니! 결과는 숫자 한 개가 일치했던 것 같다. ‘꽝’이다.

이번 로또를 구매하기 전 나름 돼지꿈을 꾸려했다. 해몽을 믿지 않지만 그래도 시도했다. 인터넷에 알려진 대로 삼겹살을 왕창 먹었다. 자기 전에 돼지 사진도 충분히 응시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돼지처럼 살만 쪘다. 바닷가에서 달리기하는 요상한 꿈만 꿨다.


돼지꿈 꾸려고 집 근처에서 먹은 삼겹살. 황홀했다. 돼지꿈 꾸려고 집 근처에서 먹은 삼겹살. 황홀했다.

■로또는 ○○이다.

‘유동성’이 시중은행을 능가했다. 3~4평 공간에 만 원, 오천 원짜리 현금이 쉴 틈 없이 오갔다. 늠름한 척 서 있는 바로 앞 문현금융단지가 뻘쭘했다. 손님 회전율은 포방터 돈까스 가게 수준. 오락가락 빗줄기도 식힐 수 없는 부산 범일동 로또 명당의 열기다.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떨치는 부산 범일동 로또방.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떨치는 부산 범일동 로또방.

12월 26일 이곳에서 만난 최성일(67·부산 해운대구) 씨. 그에게 로또는 [기회의 공평]이다. 태생에 관계없이 똑같은 조건과 경쟁으로 일궈낸 결과물이다. 부정과 부패가 판치는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매력덩어리. 이런 끌림에 로또를 1회 때부터 뚝심 있게 샀다. 물가 변동에도 개의치 않고 매주 2만 원씩 투자했다. 여태껏 최고 당첨금액이 5만 원. 그래도 계속해서 ‘공정한 과정’에 참여하고 싶단다.

“대통령이 공정을 외치면 뭐 하냐고. 권력자, 정치인 다 사리사욕 채우기 바쁘잖아. 비겁하고 반칙이 난무하고. 그런데 이건 그런 게 없잖아. 바람도 쐴 겸 일주일에 한 번씩 사러 오는 거지. 허허.”

이지만(가명·32·부산 연제구) 씨에게 로또는 [빚 청산]이다. 당첨되면 1억 8000만 원의 신혼집 대출금부터 갚을 거다. 남은 돈으로 와이프에게 외제차 마세라티 한 대도 선물할 계획이다. 1000만 원 단위 용돈으로 ‘끝판왕 효도’도 꿈꾼다. 매주 가족 생일, 결혼기념일을 이리저리 섞어 ‘인생번호’가 될 숫자를 고른다.

“모은 돈은 없는데 결혼은 해버렸고…. 나라에서 대출은 해주던데 상환 기간이 30년!! 말이 30년이지 언제 다 갚습니까. 와이프 창업 자금, 집 대출금 합해 한 달에 150만 원씩 빠집니다.”

박미경(가명·60·부산 서구) 씨에게 로또는 [우리네 인생]이다. 언제 어디서 역전이 일어날 지 모른다. 매달 서너 번 3000원을 투자해 한 방을 노린다.

미경 씨는 주부로 살면서 나름 돈 걱정 없이 ‘오르막 인생’을 살았다. 그러다 50세가 됐을 때 급격한 내리막길행. 남편 보증 문제가 터졌다. 뒤늦게 ‘돈벌이 전쟁터’에 뛰어들어 한 푼 두 푼 모으고 있다. 젊은이들이 겪는 비정규직의 아픔을 느끼고 있단다.

“젊었을 때 아무리 잘나가도 늙어서 쪽박 차는 게 인생이지. 아무도 몰라. 그게 로또 아닙니까. 누군가 정규직 전환되듯이, 내가 당첨 안 돼도 누군가는 대박 터뜨리겠지예.”


■몰빵은 금물

‘될놈될’. 될 놈은 된다. 이날 로또 명당에서 만난 ‘로또러’들의 건전한(?) 마인드다. 대부분 과도하게 로또를 지르기보다, 한 달에 서너 번 하며 우연히 될놈될을 바랐다.

그러나 몇몇은 쿨내가 진동했다. ‘자동 선택’으로 1인 한도인 10만 원어치를 한 방에 결제했다. 돼지 열 마리가 꿈에서 나와 똥을 싸질렀나 보다. “10만 원이요” 말이 들릴 때마다 여기저기서 힐끔 쳐다봤다. 부러움보다는 ‘쯧쯧’하는 안타까움이다.

로또러들은 왠지 될 것 같은 ‘기분 좋음’을 느낄 만큼만 지르라고 조언했다. 진짜 한탕 해야지 하는 사람치고 5000원짜리 된 것도 못 봤단다. 머피의 법칙처럼 꼭 10만~20만 원어치 로또를 산 사람 다음 사람이 걸린단다. 말 그대로 복불복. 버스 지나가면 다음 버스 기다리듯이 느긋한 자세를 추천했다.

이날 일확천금에 빠진 지난날을 후회하는 사람도 있었다. 몇 년 간 매주 15만 원 이상 로또를 산 한 손님은 이제 당첨돼도 손해나 다름없다고 한다.

“다시 돌아가면 우리 새끼들 한우나 왕창 사주고 싶습니다.”


■당첨!!

인생역전의 D-day. 당첨번호 발표일인 토요일이다. 사실 토요일 저녁까지 발표일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오른 ‘891회 당첨번호’를 보고 알았다. 로또를 샀을 때 기대와 설렘은 하루가 고작이었다.

컴퓨터 책상 앞에서 판도라 상자를 열었다. 홈페이지에 뜬 당첨번호를 하나하나 읽었다. 9 13 28 31 39 41 보너스 19. 두근두근.

쪽박이다. 당첨이 되긴 했다. 5000원짜리 2장. 쓸모없는 연습종이가 그나마 가짜 만 원을 벌어다 줬다. 번호를 맞춰보던 와이프가 별 말 없이 일찍 자리를 떴다. 씁쓸했지만, 한편으로 다행이다.

당첨번호 일일이 굴려가며 생고생했는데…. 당첨번호 일일이 굴려가며 생고생했는데….

신기했다. 3000개 숫자를 체크하면서 웬만한 조합은 나왔다고 봤다. 그러나 당첨번호와 일치하는 숫자는 많아봐야 3개. 2개가 일치한 조합도 5개 정도다. ‘다시 도전하면 되겠다’가 아니었다. 또 해도 안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추천하고 싶지 않다

동행복권 홈페이지 캡처 수정본. 동행복권 홈페이지 캡처 수정본.

개인적으로 소액이든 고액이든 로또는 비추천이다. 바다는 메워도 사람의 욕심은 못 채운다더라. 소소한 즐거움의 5000원이 은근슬쩍 몸집을 키울 것만 같았다. 구매 한도가 있지만, 로또방을 옮겨 다니면서 사면 사실상 문제 없다.

돌아보면 로또 명당의 유명세도 어느 정도 허상일 수 있다. 구매자가 많을수록 당첨 확률이 높은 건 당연하지 않나.

하루아침에 집값이 1억이 오르는 세상이다. 잘 나가던 가게가 하루아침에 망하기도 한다. 팍팍한 삶에 불확실성이 겹친 것이다. 어려울 때일수록 냉정함을 유지해야 한다. 과도한 로또는 벼랑 끝 사람을 당길 수 있지만, 밀 수도 있다. 장 보다가, 산책하다가 우연히 로또방이 유혹하더라도 딱 한 장만 사시길….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P.S. 슬기로운 호구생활을 응원해주시는 독자분들께 항상 감사드립니다. 호구생활을 하기 바라는 아이템이 있다면 lee88@busan.com이나 댓글로 기탄 없이 남겨주세요.^^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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