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濟砂宅智積堂塔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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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0 22:56
한자명칭 | 사택지적비 | 국적-시대 | 한국-백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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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질 | 석-화강암 | 용도 | 사회생활-기념-비 | ||||
크기 | 현재높이 109,너비 36,두께 28 | 출토지 | 충청남도-부여군-부여읍 관북리 | ||||
소장구분 | 국립1-부여-부여 | 소장품번호 | 101 | ||||
세부번호 | 0 | 지정구분 | 도지정 |
이 석비는 글자를 새기기 쉬운 양질의 화강암 한면을 편평하게 잘 다듬어서 가로·세로의 井間을 나누어서 그안에 한글자씩 비문을 음각했는데 각행이 세로로 14자씩의 명문이며 현재는 4행만이 남아있다. 정간은 정방형으로 한변이 7cm이다. 이러한 井間內에 문자 投入式은 삼국시대 古碑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형식이다. 사택지적비는 오른쪽 상부에 있는 직경 2cm의 圓內에 봉황문을 음각하고 圓周線內에 朱色을 칠한 흔적이 남아있는데, 이는 이수에 磻龍을 조각하기전 봉황을 조식한 중국의 형식을 받아들인 결과로 보인다. 이러한 점에서는 사택지적비가 새로운 형태의 석비라 하겠다. 현존 4行의 비문은 다음과 같다. [[甲寅年正月九日奈씨城砂宅智積 慷身日之易往慨體月之難還 穿金 以建珍堂鑿玉以立寶塔巍巍慈容 土神光以送雲峨我悲貌含聖明以]] 비문에 있어서는 중군 육조시대의 사육변려체된 동시에 字體도 雄建한 毆陽詢體이며 同代의 신라 금석문과 비교해보면 백제문화의 발달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을 간단히 말하면 "奈씨城의 砂宅智積이 몸이 날과 달로 늙어감을 한탄하여 金으로 佛堂과 玉으로 塔波를 만들어 세우니 그 建造物의 偉觀이 壯嚴하다."는 뜻이라 하겠다. 비문에서 지적한 '奈씨城'은 부여읍 사삼십리의 은산면 내지리로 추측되며 '砂宅智積'은 이곳의 城主가 아니었던가 한다. 初行에 '甲寅年正月九日'이라고 干支로 연호를 대신하였고, 사택지적은 {일본서기} 卷第24 皇極天皇壬寅年七月條에 '饗百濟使人大佐平智積等於朝'라는 기록을 참조하면 백제 의자왕 14년(A.D 654) 건립으로 추정된다. 이 석비는 비록 斷石이나 당시의 文體와 書法 및 비문의 양식, 여기에 나오는 인물, 특히 堂塔을 奉安한다는 불교미술적인 면등 백제사 연구의 귀중한 금석문으로 史科的 가치가 매우 크다.